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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나쁜 날

잡담 2014.04.28 16:44
내 생애 가장 운수 나쁜 날은 언제였을까?

7살 즈음, 고모 댁에 놀러 간다고 신나서, 내리막길을 주머니에 손 넣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다가 고꾸라져 이마를 수바늘 꿰맨 날.
국민학교 3학년 즈음, 롤러장에서 기둥 잡고 쉬려다가 쌩 지나가는 학생에게 부딪혀 오른 손목을 삐었던 날. 침 맞을 때 고통스럽지만 시원해지는 신기한 경험도 하게 해주었지.
고등학교 1학년, 이틀 정도 아픈 배를 움켜쥐고 참다가 결국 맹장 수술하러 병원에 실려간 날.
고등학교 2학년 즈음, 사과를 크게 베어 물다가 왼쪽 턱이 어긋나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평생 악관절에 시달리게 만든 그 날.
대학교 2학년, 지금의 아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집에서 출발하여 학교로 향하다가 출발 1분만에 넘어져, 나는 쏘~옥 빠져나와 안 다치고 아내는 무릎이 깨져 피가 철철 나던 날.
2001년 정도 어느 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집 앞에서 두리번 거리다가 오른 발목을 접질러 그 뒤로 5년 정도 고생했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대충 굵직한 운수 나쁜 날은 이랬다.

그 뒤로 역사에 길이 남을 하루가 오늘이 아닐까.
(나이 먹고서는 머리 깨지거나 어디 다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출장지인 신탄진으로 가기 위해 여느 월요일과 같이 06:10에 집을 나섬.

베란다에서는 비가 안 오는 듯하여 그냥 나섰으나 밖에 나오니 비가 추적추적 내림. 에이 귀찮아. 회사 사무실에 우산 있으니 갈 때만 잘 버텨보자. 그냥 출발~

대로변의 버스 정류장에 가기 전에 운 좋게도 집 앞 정류장에서 1-5를 3분 만에 만나 편하게 두 정거장을 이동.

다음 버스편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노선인 8번 버스가 도착하기 12분 전. 우라질. 이렇게 늦게 온 적은 한번도 없는데... 빗방울이 점점 거세짐.

06:33 정도 8번 버스에 올라 타고 다음 정류장에 40분 정도 도착. 음... 점점 촉박해지는군.

금정역으로 가기 위해 다시 초록버스에 올라탐. 그런데 바로 이 때 탈 사람도 내릴 사람도 없는 정거장에서 내가 실수로 벨을 누름.
차가 정차할 때 "죄송해요 잘못 눌렀어요." 기어가는 목소리로 두번이나 기사아저씨에게 연신 사죄(?)함.
나의 분석으로는 이 때가 오늘의 운수가 갈리는 키포인트임.

세 정거장만에 금정역에 도착하여, 달리고 달렸으나 눈 앞에서 전철을 놓침. 헥헥...

다음 전철 도착 예상시각과, 안양역에서 출발하는 예약 기차 시각(06:55)은 불과 2분 차이.

어쩐다 이걸 어쩐다. 에라~ 냅다 뛰어 금정역 밖으로 나가서 택시 잡기 시도.
건너편에는 택시가 많으나 내가 나간 쪽은 눈을 씻고 쳐다봐도 택시 안옴. 비 맞으며 손을 흔들어 댔지만 택시 한대가 좌회전하려는지 쌩~ 지나감. 50분 넘어섬. 어차피 바로 택시를 잡는다 해도 5분 안에 안양역 가기는 어려워 보임. 뒤를 보니 다음 전철이 이미 도착하여 출발하려 함. 아~ 스트레스 80%.

헛탕 치고 다시 생돈 1,100원 띡~하고 대책 없이 전철 타러 들어감. 06:55 기차 다음에 출발하는 신탄진행이 8시 넘어서 있는 것으로 기억남.
그냥 안양에서 대전행 무궁화호 다음 걸 타야지 뭐.
아까 괜히 밖에 나갔다 오지만 않았어도 그나마 돈 안 버리고 빨리 가는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힘들게 하는 건 현 상황이 아니라 후회임.

전철 타고 가면서 이래저래 머리를 굴리다가 KTX가 생각남.
그래 어차피 대전으로 갈거면 KTX로 빨리 가면 지각 안 하겠다!
1588-7788 전화하여 대전행 KTX 물어보니 07:27 자유석 있단다. 올레. 그래 아직 하늘은 나의 편이야.
아까 택시 타보려는 시도만 안 했으면 전철비는 안 날리는 건데... 벤댕이 속이 쓰리다.

금천구청에서 광명역행 전철 시간표를 보니 07:24 출발. 우씨 이런... 시간표 옆에, 시간이 안 맞으면 1번 출구로 나가 1번 마을버스 타란다. 그래 알았다. 간다.

2분 만에 1번 마을버스 승차.
07:15 인데 가능할까? 마을버스면 여기저기 안 설 데 설 데 다 설텐데... 택시 탈 걸 잘못했나?
...그런 생각하면서 노선표를 봤는데 광명역은 어디에도 없음.

"기사 아저씨 이거 광명역 가나요?"
"아뇨"
'헐~'
그 안내문은 뭐람. 안내문 탓할 때가 아니다.
세 정거장 만에 내림.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비는 점점 거세짐.

비 맞으며 길 건너 택시를 올라타고 광명역으로 고고! 제발 빨리 고고!
출근 시간대 금천구청역에서 광명역까지 5분만에 가리라 생각하지는 않겠지 바보야? 이미 마음을 내려놨음. 다음 기차가 있겠지 뭐.

택시비 6,500원 물고 매표소에서 07:46 기차표 사서 내심 기뻐함. 그래도 08:34 대전 도착이면 지각은 안 하지 않을까?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오징어땅콩 과자를 사서 기차에 올라, 옆에 선 4명에는 신경 쓰지도 않고 벽에 기대 마구 씹어댐. 아 스트레스 날아가는 소리...

대전에 08:38 도착. 민생의 지팡이 경찰아저씨에게 신탄진행 버스 방향 물어보고 나갔더니 숙소에서 자주 보던 빨간색 2번 급행 버스가 눈 앞에 섬.
오호~~ 이제부터 슬슬 잘 풀리려나... 급행이니 빨리 가겠지. 낼름 올라탐.

급행인데 서는 정류장은 거의 같아 보임. 기사 아저씨, 대전 출신인지 겁나 느긋함. 속 터짐.
신탄진역을 지나 출장지 근처 정류장에 내린 시각 09:30.
집 나선 이후 가장 거센 비. 그래 맞자. 맞아. 아~ 시원해.

이제 힘겨운 출근길이 끝났나 싶었으나 최근 영화에서 나온 유행어, 역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님"
횡단보도 앞에 서서, 지나가는 SCANIA 대형 트럭이 사뿐이 밟고 뿌려주시는 흙탕물을 온몸으로 받아주심. 하하하...
이게 바로 운수 나쁜 날의 정점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신에 물 맞은 생쥐 같은 내 모습을 이 글과 함께 사진으로 올려 기록하고 싶은 날.
그래도 글로 적고 보니 대수로운 일도 아닌 생각이 드는군.

역시 사람이 스트레스 받으면 감정이 부풀려지는 모양.
그러면서 있는 사실도 왜곡하게 되는 거겠지.

오늘 숙소 가서 잠들기 전까지 또 무슨 행운(?)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래도 난 살아있음에 감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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