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잡담 2006. 6. 23. 09:33
학원을 마치고 집에 와 씻고 나자 아내가 전화를 바꿔줬다.

11시가 다 된 시각에 누가 날 찾을까 의아한 마음으로 전화기를 받았더니

얼마 전 만난 대학 동기 녀석이 근처에 올테니 술을 사달라 막무가내였다.

대학 생활 동안 자취하면서도 내게 그런 적 없는 녀석이라

'인석이 뭔 일 있나?'

이런 저런 오만가지 상상을 하며 약속 장소로 부랴부랴 나갔다.

약속 장소에서 20분이 넘도록 전화도 안 받고 안 나타나던 녀석이

내가 앉았던 벤치 뒷쪽에서 택시를 내리며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이 자슥, 졸려 죽겠구만. 전화도 안 받고..."

다행히 별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었고 그냥 술 한잔 하고

집에 가는 길이라 얼굴 한번 보려고 전화를 했다며

포장마차서 떡볶이, 순대, 튀김을 이리저리 골라 사서

아내 얼굴 한번 보고 집에 가겠다며 길을 재촉했다.

싱거운 녀석.




잠에 취해 헤어나오지 못 하겠다던 아내도 들어와보니

어느 새 친구 맞을 준비(?)에,

혹 친구 녀석이 자고 갈까봐 방을 치우고 이부자리까지 봐놨다.(에이그~ 이쁜 마누라)

셋이 앉으면 물 셀 틈 없는 거대한 거실에서 우리는 분식과 과일을 먹고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늘어놓으며 먹고 웃고 때론 생각에 잠겼다.

축구가 한창일 무렵 아내가 부른 콜택시를 타고 집으로 떠난 친구는

택시 탄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전화를 걸어,

"헤~ 미안해서. 한밤에 느닷없이 찾아가서 미안해. 또 보자~"

라며 같이 있을 때 댓번도 더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난 여지껏 친구들을 참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해 왔지만

한밤 중에 친구가 보고파 느닷없이 찾아가 본 적도 없고

또 술 취한 친구 녀석 손에 택시비 쥐어주며 기사 아저씨께 잘 부탁한다고 얘기해 본 기억도 없다.

오늘 그 녀석은 멀쩡한 정신에 택시비를 빌려갔지만

새삼 소중한 추억을 갖게 해준 답례로 내일 아침에 잊었으면 좋겠다.

택시비를 갚으면 왠지 그 기억들이 빛바랠 것 같다. 흐흐.


살다보면 불현듯 그렇게 주변 사람들의 잔상이 머리를 스치며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 닷트칸에 내가 운좋게 선택된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새삼 느꼈다.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도 참 고마운 일이 아닌가.


두 아이의 아빠 노릇하며 고달픈 회사일에 시달리는 친구에게 힘내라고 해주고 싶다.

 

그런데 어제 먹다 남은 떡볶이와 튀김을 아침으로 먹고 왔더니

배가 살살 아프다.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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