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조기 출근

잡담 2008. 7. 11. 06:54

어제 저녁, 식사를 마친 아내가 직장 동료들과 맥주 한잔 한다고 8시 정도 외출을 했다.

운동을 다녀오고 웹서핑과 TV로 시간을 보내던 중 어느 덧 새벽 1시가 되었다.
그런데 아직 아내에게는 문자나 전화 한 통화 없다. 슬슬 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늦게까지 연락없이 안 들어온 이유로 두어차례 크게 화를 낸 전력이 있음에도 아내는 또 다시 내 인내를 시험한다.
잠이 쏟아져 침대로 갔지만 눅눅한 날씨와 아내 생각 때문인지 좀처럼 잠이 안 든다.
이미 걱정의 단계는 넘어섰기에 내가 먼저 전화하는 일은 없다. 오기로 인해 배가되는 분노의 단계인 것이다.

엎치락 뒤치락하던 차에 1시52분경 문자가 울린다.
   "여보, 노래방 왔어. 걱정마."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 이미 걱정은 않는다.

선잠이 한두번 들었다가 더워 선풍기를 틀며 시계를 보니 3시10분.
시간상 노래방에서 10분 서비스 한두번 더 받고서 지칠 단계겠구먼.
아이가 없다지만 나는 아랑곳않는 듯한 아내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라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 집에 왔는데 내가 없으면 아내도 황당하겠지?
내가 화난 걸 보면 분명 또 잘못했다고 할 것이고 결국 나만 옹졸한 사람되어 씩씩거리며 아침 나절까지 열받을 것이 불보듯 뻔하다. 지하철 첫차 시각을 생각해보니 시간도 얼추 괜찮은데 출근을 해야겠다.

그 때부터,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올까봐 마음 졸이며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선지 2분 정도 후 또다시 문자 띠리링. 노래방에서 이제 나왔단다.
20여분이 지나고 전화가 울린다. 무시한다. 한참동안의 진동이 그치고 서둘러 문자를 찍었다.
   "여보, 출근하는 길이야. 걱정마."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다시 전화가 울린다. 오, 거절이란 기능도 있군. 거절을 누르고 문자 전송을 누른다.
잠시 후 문자가 다시 온다.
   "엥, 벌써?"
이런... 이 여자 분위기 파악 못 하는군. 자기 문자 흉내내어 비꼬는건지 눈치를 못 챈겨?

그 뒤로 두어번 전화가 더 울린 후 전화를 받았다. 잘못 했으니 집으로 오란다.
   "화 많이 났어?"
이럴 때는 옹졸함이 탄로나는 듯한 느낌이라 선뜻 대답도 못 한다.
오늘 아내가 처가 가서 하루 자고 올 계획이었기에,
   "지하철 기다렸다가 첫차 타고 출근할테니 당신도 자고 내일 얘기해. 끊어."
하며 잠깐의 정적을 기다렸다가 먼저 끊었다. 상대방 기척을 확인 않고 전화기를 끊어본 게 언제던가.

음, 집에서 인덕원까지 걸어서 30분이면 도착하는군. 지하철 근처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1시간 동안 라디오, MP3도 듣고 핸드폰 지상파 DMB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기분이 썩 괜찮은데?
5시가 되어 지하철에 가보니 셔터도 올려져 있고 개찰구 통과도 된다.
다시 첫차가 올 때까지 26분간 플랫폼 앞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듣는다.
첫 지하철에는 나 혼자 탈 줄 알았는데 웬걸. 각 출입칸마다 한두명씩, 수십명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간신히 앉았지만 사당역에서 갈아탄 2호선은 서있는 공간도 거의 다 찼다. 와~ 이른 아침을 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회사에 도착하니 아주머니께서 휴지통을 비우고 계시다. 자리에 앉은 시각 6시9분. 출근하기로 결정한 건 참 잘 한 일이었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 동안 이미 폭발할 듯한 열은 다 식어버렸으니까 말이다.
이제 걱정/근심 → 분노 → 폭발 → 잦아듬 단계를 지나 마지막으로 미안함의 단계에 이르렀다.

부부는 법보다는 신뢰로 맺어진 관계로 봐야 한다. 신뢰에 금이 가면, 배우자가 밤늦게 안 들어오며 노래방이라고 할 때 과연 정말로 노래방에 있는 것일까...하고 의구심을 느끼게 되고 그 순간부터 댐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물론 내 부부관계가 그 단계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성인이 되고나서부터 난 사랑은 노력이라고 생각해왔다. 결혼 8년차지만 아직 안착 단계가 아닌 절대적 노력의 시기임을 나와 아내가 실감하며 지냈으면 좋겠다.

나는 이해를, 아내는 존중을...

아~함. 완전 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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